*고운그림의 향기*

땅거미가 내리면

맘님 2022. 4. 29. 21:45

2001년 정숙진作 [땅거미가 내리면] 53.0X45, 5

[정숙진의 누드 에세이] <2> 어느 노교수의 제안

스포츠 조선 누드 에세이 연재

총장까지 지낸 노교수님 "나를 모델로 그려보시죠"

하버드출신 60대 후반 뜬금없이 "보여줄까요"


'땅거미 질 무렵'(2001년 작).oil on canvas


가을의 끝자락 속에 겨울이 다가오는 어느날,

따르릉 전화 벨이 울렸다.
 "선생님 P 기자에요.

선생님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A대 대학원 B교수가 부탁해 왔는데 어떻게 할까요?"
 "그래요? 가르쳐 드리세요.

어차피 어떻게들 아시는 지
메일도 전화도 늘 오는 걸요 뭐."
 바로 연락이 닿았던 지 잠시 후
그 B교수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따.
 "안녕하세요. 여성잡지의 기사와 책을 보고
어떤 분인 지 한번 뵙고 싶었습니다.

지금 광화문에 나와 있는데 일이 끝나는데로
화실로 한번 찾아가고 싶습니다."
 목소리만으로는 힘이 거의 없는
노인 같은 느낌을 받으며 약속을 잡았다.
 저녁 시간이 다 돼서 그 B교수가
서울 방학동의 내 화실을 노크했다.

키는 보통이며 이마는 시원한 대머리의 교수님.

권색 싱글 양복에 점잖고 나이가 꽤 되어 보이는
전형적인 학자 타입이었다.

녹차를 받아마시며 B교수님은 용건을 꺼냈다.
 "기사를 보고 관심을 갖던 차에
우연히 서점에서 책을 보고 너무나 만나고 싶어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제가 느낀 소감을 솔직히 말씀드린다면
대범하고 근본이 있고 육감적인 분 같아요.

꼭 영화배우 최은희씨를 연상시킨다고 할까?"
 B교수는 이어 자신이 아는 누가 이번 대선에
나온다더라는 등 자신의 위세를 과시하는

정치, 경제, 사회적 이슈들을
이야기들을 쏟아냈다.
 그리고는 예정된 수순처럼
저녁 식사를 제안해왔다.

그러나 나는 그와 식사를 하고픈 마음이
전혀 없었기에 정중히 거절했다.

그러자 그는 그러면 호프라도 한 잔 하자며
한사코 내 팔을 이끌었다.

나이 지긋하고 직책 높으신 분의 부탁이니
계속 거절할 수 없어 하는 수 없이
근처 호프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런데 그는 식전에 호프를 몇잔 마셔
취기가 돌았는 지 갑자기 나를 대경실색케하는
말을 냅다 내뱉었다.
 "나는 자라 XX인데요.
안 쓸 때는 접어뒀다가 쓸 때는 크게 나옵니다.
이런 얘기 들어봤어요?"
 나는 우습기도 했지만 대중적 지명도가 높은
누드 작가로서 흔히 겪는 일이었기에
대수롭지 않은 척 웃어넘기려 했다.

그런데 그는 이런 내 마음을 아는 지 모르는 지
이야기를 계속했다.
 "보여줄까요? 그려주시겠어요?"
 화실에서의 모습과는 영 딴판.
당황해서 말을 잇지 못하자
그는 하던 말을 계속했다.
 "나 이래뵈도 하버드 나와 모 대학 학장과
총장을 지냈고 정계 자문까지 하는 사람이오.

정 선생은 나 같은 사람 만났다는 걸
영광으로 생각해야할 것이오."
 빨리 자리를 뜨고 싶었지만
그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그 말을 반복했다.
 "나는 자라 XX인데. 나를 모델로…."
 아무리 그래봐야 내가 요지부동이자
그는 한술 더떠 이렇게 제안해 왔다.
 "나는 국모를 찾고 있어요.
국모가 되어줄 수 없겠오?
한복을 입으면 잘 어울릴 것 같소.
모자를 벗어보시오."
 정말 정신이상자가 아닌가 싶었다.

어떻게 최고 학벌과 지위를 다 갖춘 사람이
6학년 8반이 다 돼가는 나이에

7학년 안에 자기가 국왕이 될꺼라는 등의
허황된 이야기를 떠들어대는 지.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강제로 일으켜서는
차를 태워보내드렸다.

싸늘한 가을 바람을 맞으며 화실로
돌아오는데 자꾸만 헛웃음이 나왔다.
하늘에는 별이 총총했다.



자료 : 스포츠조선2002-03-07 12:33
http://cafe.naver.com/sjchung.cafe

스포츠조선 2002, 2, 22 편집자 주

스포츠조선은 대중적 인기를 누리고 있는 누드 작가

'정숙진의 누드 에세이'를
오늘부터 매주 금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정숙진의 누드 에세이는 정씨의
누드 그림 한 컷과 성과 관련한 웃지못할

에피소드와 단상들을 곁들이는
독특한 양식의 칼럼으로

비주얼의 미학과 텍스트의 재미를
모두 갖췄다는 점에서

애독자들의 눈길을 끌만한
신선한 코너가 될것입니다.
정숙진씨는 홍대 미대 대학원을 졸업.

국내외전 560회여회를 가진 중견 작가로

특별히 여성의 누드와 남성의 성기 등을 테마로

많은 그림을 그려 TV 등 주요 매체에

누드 작가로 다수 소개돼 온 스타 화가로

지난해 누드 에세이집
"빈 가슴을 채우는 여자"를 펴내

많은 호응을 얻기도 했습니다.
애독자들의 많은 애정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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