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운그림의 향기*

[스크랩] 파리를 풍미했던 강렬한 삶과 사랑의 화가, 모딜리아니

맘님 2016. 12. 22. 20:27

파리를 풍미했던 강렬한 삶과 사랑의 화가

 

        모딜리아니 

                           (Amedeo Modigliani 1884 ~ 1920)  

 

1884년, 리브른느는 피렌체 남쪽의 포구의 한 유태인의 가정에서 태어난 모딜리아니.

 

소학교 시절의 모딜리아니는 그림에 뛰어난 소질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폐결핵을 앓을 만큼 잔병치레를 많이 했고, 선천적으로 허약한 그는 10살에 늑막염을 앓고, 14살 때에는 장티푸스와 폐렴 때문에 중학교 과정을 중퇴했던 모딜리아니는 미케리의 화실에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다.

 

또한 17살이 되던 해에는 폐병이 재발하여 요양한 후 어머니와 함께 로마와 피렌체 등지의 미술관을 여행하며 그의 예술적인 잠재력은 본격적으로 유발하기 시작한다.

 

미술사에서 모딜리아니를 얘기할 때면 여러 가지 평들이 거론되론 되곤 한다. 심지어는 미술계에 등장한 화가 가운데서 가장 미남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그는 가난했으나 술을 좋아했으며, 때로는 마약에 중독 되기도 한다.

그러나 고독과 우수에 가득 찬 파리 생활의 표정은 ‘오직 모딜리아니에 의해서만이 표현될 수 있다' 라는 평가가 있을 만큼 20세기의 빼어난 화가임에 틀림없다.

 

1906년, 모딜리아니는 파리로 나와 몽마르트에서 살기 시작한다. 이때, 모딜리아니는 몽마르트와 몽파르나스에서 만난 예술 동지였던 시인과 화가들, 키슬링·막스 자콥·수틴·앙드레 살몽·호안 그리즈·피카소·블라맹크·블레즈 상드라르 … 등의 초상화를 그렸다.

 

1908년 처음으로 앵데팡당전에 회화 6점을 출품함으로써 정식으로 화가로서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게 된다.
그러나 매일매일의 빵을 걱정해야 하는 극도로 궁핍한 생활에 허덕이게 된다.

그는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헐값에 그림을 그리고 술과 마약, 방탕한 생활에 의지해 현실을 잊으려고 한다. 하지만 난폭하고 기이한 행동을 일삼던 비관적인 생활 속에서도 그의 붓끝에서는 따스한 애정과 연민 속에 탄생된 다양한 인물들이 호흡을 이어간다.

 

1909년 콘스탄틴 브랑쿠시를 만나 그의 격려에 힘입어 한 동안 조각을 시도하기도 하고, 세잔느의 대전람회를 보고 깊이 감명을 받아 <거지> <첼로 연주> 같은 작품을 그리기도 한다.

 

1913년부터는 몽파르나스에 거처를 정하고 키슬링·수틴·피카소 등과 친교를 맺는다. 이 무렵부터 모딜리아니 특유의 스타일을 개발하여 이색적인 작품을 선보이기 시작한다.

 

모딜리아니는 사람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많았던 화가이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일관된 주제는 사람이다. 그는 초상화나 나부화, 그리고 모두 인물이나 인체를 그렸다. 하물며 조각품도 모두 사람을 소재로 그린 것이다.

 

 

                                                   

                               퐁파두르 부인의 초상, 캔버스 . 유채, 1915

이 퐁파두르 부인은 모딜리아니와 동거했던 (1914~16) 비아트리스를 대용해서 그린 것.

영국 여성인 비아트리스가 몽파르나스에 나타난 건 제1차 대전이 발발하던 해 였으며, 사람들은 그녀를 런던의 시인이라고 불렀다. 결코 미인은 아니었지만 모딜리아니의 진가를 발견하고 그의 천재성을 개화시킨 숨은 공로자이다. 모딜리아니보다 5살이나 연상인 그녀는 그의 사기를 잘 참아 주었다고 한다. 그가 광분하면 '모딜리아니, 명심해요, 당신은 신사라는 걸. 당신의 어머니는 상류 사회의 부인이라는 것을 .'하며 타일렀다는 것이며, 이 말은 주문처럼 모딜리아니의 광기를 가라앉혔다고 한다. 그럴듯하게 모자를 쓰고 마치 귀족처럼 차린 이 그림을 퐁파두르 부인이라고 명명한 것은 이들의 사랑이 무르익을 무렵의 정경을 암시하는 것도 같다.

 

20세기가 시작되면서 전세계 화가들의 발걸음은 한 곳으로 모여들기 시작한다. 예술인의 낙원 파리로.... 이들을 에꼴 드 파리는 파리화파라고도 하는데,  20세기초에 유럽 예술의 중심지였던 파리에 몰려 든 이방인 화가 집단을 말한다.

 

이들은 공통적인 양식을 추구한 화가들이 아니고 예술의 중심지에서 자신의 개성적인 화풍을 구사한 화가들로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남기고 있다. 그리고 모딜리아니의 아름다운 사랑얘기와 함께 방랑자적인 예술가 기질로 유명하다

 

모딜리아니는 이 낙원의 도시 파리를 풍미했던 강렬한 삶과 사랑의 화가로 불린다. 이는 모딜리아니가 죽은 후 그의 부인인 잔느 에뷔테른느가 이어서 자살했다는 유명한 일화만 보아도....

에뷔테른느는 임신 5개월인 채로 모딜리아니가 죽은 다음날 5층 건물에서 떨어져 자살을 하고 만 것이다. 모딜리아니의 작품 속에 그려진 인물들은 한눈에 봐도 특이한 형태로 그려져 있다. 특히 모딜리아니만의 이 독특한 캐릭터들은 모딜리아니가 원래 조각가를 꿈꿔 왔고 아프리카 원시조각들의 형태들이 회화 속에 상당 부분 반영된 것이다. 또한 모딜리아니의 초상화는 형태를 왜곡시켰지만 가면 같고 평면적인 양식을 통해서도 절묘하게 심리를 잘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모딜리아니의 탁월한 예술성을 입증해 주는 단면이라 할 수 있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독특한 형태와 단순한 색채, 그리고 세부적 묘사가 없는 배경을 통해 더욱 강한 느낌을 전해 주고 있다. 이들의 모습을 통해 모딜리아니는 자신의 내면 세계를 화폭 위로 옮겨놓고 있는 것이다. 모딜리아니가 이처럼 독특하게 변형된 형태의 인물상을 완성시킬 수 없었다면, 그는 아마도 흔한 초상화가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만의 양식이 담긴 인물 속에 모델들의 심리적인 상태를 표현함으로써 오늘날 위대한 화가로 평가받는 것이 아닐런지...

 

 

큰 모자를 쓴 쟌느 에퓨테른느,  캔버스 . 유채 1917 .

 

여학생처럼 청순한 처녀가 몽파르나스의 로톤드(카페 이름)에 드나들기 시작한다. 눈동자도 머리 빛도 밝았던 이 처녀는 모딜리아니 등의 예술가들이 모여 앉아 떠들고 있는 쪽을 조심스럽게 바라보기도 한다. 들리는 말로는 그림 공부를 해보려고 몽파르나스에 온 것이라고들...

얼마 후 이 청순한 처녀인 쟌느 에퓨테른느가 모딜리아니와 서로 팔짱을 끼고 몽파르나스 거리를 지나가는 정경을 사람들은 목격하게 된다. 드디어 모딜리아니도 행복을 잡았구나 하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그녀는 모딜리아니의 생의 반려가 되며 앞으로 삼 년간 로톤드의 맞은 편 그랑 쇼미 엘거리에 셋방을 얻어 같이 살게 된다. 한때나마 안정된 시기가 찾아오며 모딜리 아니의 독자적인 표현 양식은 급속도로 만개하게 된다.

 

이처럼, 초상화에 등장하는 모델들은 대부분 화가와 친분이 있는 인물들이다. 이는 모딜리아니가 그만큼 모델과의 심리적인 교감을 중시했기 때문인데, 그는 작품 속에서 모델들의 삶과 인생의 깊이를 표현해 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화가라는 것을 보여준다.

 

 장 콕토의 초상,  캔버스에 유채,  1917

 

이러한 초상화들 가운데 <장 콕토의 초상>(1917)이 있다. 이 초상화 속에서의 시인은 프록코트를 입고, 나비 넥타이를 매고, 가슴에 하얀 행커치프를 슬쩍 꼽고 있는 약간 뽐내는 듯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1918년 남불 니스에서 요양할 때 여러 점의 풍경화를 그린 적이 있지만, 그의 회화 작업 과정에 있어서 특별히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정물화는 거의 그리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해, 라피트 거리의 베르트 베이유(Berthe Weill) 화랑에서 최초의 개인전을 연 뒤, 방종한 생활과 음주·아편 등으로 악화된 결핵을 치료하기 위해 니스로 간다.

 

1919년 파리로 다시 돌아왔으나 중태여서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받던 중, 이듬해 1월 25일 36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내가 모딜리아니에 심취하게 된 계기는 천재 시인 장 콕도을 통해서 였다.

장 콕도의 <몽파르나스의 모딜리아니>라는 짤막한 에세이를 접하고서 라고나 할까?

 

장 콕토는 이렇게 모딜리아니를 회상한다.

 

“유채로 나의 초상을 그려 주었던 시기에 우리들은 더욱 깊은 관계를 맺게 됐다.”

                                                              

                                                                       

또한 장 콕토는 모딜리아니의 데생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모딜리아니의 데생은 최고의 엘레강스이다.
그는 우리들 모두의 귀족이다. 마치 유령의 선(線)처럼 보이는 핏기 없는 그의 선은 결코 서투름에 빠진 적이 없다.
그의 선은 샴 고양이의 부드러움으로 서투름에서 벗어난다.

모딜리아니는 얼굴을 길쭉하게 늘여 놓기도 하고, 불균형을 강조하기도 하고, 눈을 도려 내기도 하고, 목을 길게 늘여 놓기도 한다.
이런 모든 것이 그의 눈과 혼과 손에 의해 재구성되는 것이다.
라 로통드 카페의 테이블에 앉아 쉼 없이 사람들의 얼굴을 그리면서(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많은 초상이 있는 것이기에) 그는 사람들을 판단하고, 감지하고, 사랑하고, 또 비난하기도 한다. 그의 데생은 말없는 대화인 것이다.”

 

 - 몽파르나스의 모딜리아니  중에서-

 

병과 빈곤과 알콜중독으로 신음하면서도 몽파르나스에서 군림했던 정신적 귀족, 마지막 보헤미안 모딜리아니.

그는 처절한 고독 속에서 살다간 불후한 화가이지만, 눈과 혼과 손으로 예술을 담아냈던 자유와 무한한 이상을 꿈꾸었던 강렬한 삶과 사랑의 화가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출처 : 은사시나무의 푸르름으로... |글쓴이 : 은사시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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