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
박완서 /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중에서
"길"
급보를 받고 달려갔을 때 오빠는
구파발의 아직 피난을 못 가고 남아 있던
조그만 병원에 방치돼 있었고 부대는 이동한 뒤였다.
진상을 더 자세히 알아도 소용없는 일이었지만
오빠는 우리가 전해 들은 거 이상을 말하려 들지 않았다.
다량의 출혈로 창백해진 오빠는 오히려 평온해 보였다.
초로의 의사는 친절했지만
그 집도 피난 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박완서 /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중에서
"연인"
남자와 여자의 접촉은 일순에 지나가 버리지 않는 무엇을 남겼고,
진이는 그 무엇으로부터 민첩하게 자기를 수습하지 못해 한동안 멍했다.
따끔한 턱과 부드러운 입술이 잠시 닿았을 뿐인,
극히 단순한 접촉에는 황홀한 기쁨이 있었다.
그건 전혀 예기치 않은, 새로운 감각의 각성이었다.
준식의 무심한 동작에는 날카롭게 날이 선 관능이 비장되어 있었고,
그날이 드디어 진이의 감각의 생경(生硬)한 외각(外殼)을 찌른 것이다...
박완서 / "목마른 계절" 중에서
"꿈꾸는 달"
산경(山景)은 해질녘보다 오히려 어스름했다.
비수처럼 차갑게 생긴 초승달이 산꼭대기에 머물러 있었다.
어둠은 습기 차서 눅눅하고 무거웠다.
마당가에 코스모스 꽃이 곤충들의 떼죽음처럼 축 처진 채 움직이지 않았다.
노부인의 모습은 안에서 볼 때보다 훨씬 작아 보였다.
한 줌밖에 안 될 것 같아 문득 가슴이 찡했다...
박완서 / "오만과 몽상" 중에서
"빛과 그늘"
이런 식이었다.
그러나 시대착오적이면서도 사람 헷갈리게 하는
이런 양반집 규수다운 법도야말로
어머니가 장만할 수 있는 유일한 혼수인 걸 어쩌랴.
자연히 피로연까지도 그의 몫이 되었다.
그는 그 당시 서울에서 제일 큰 중국 요릿집인 아서원에다
양가의 하객 수를 다 먹일 만한 피로연 자리를 마련했다.
우리 친정 친척들은 먼 친척 가까운 친척, 외가 진외가 할 것 없이
모두모두 양반님네였으므로
어쩌다 중인한테 시집보내 지체를 떨어뜨린 분풀이로
너무도 당당하게, 털끝만치도 굽 잡히지 않고,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모두모두 그 피로연에서 마음껏 먹고 마셨다...
박완서 / "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 중에서
"미망 1"
그 목고개의 선이 애처롭도록 고왔다.
내 임이 가만가만 떨리는 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앞산에는 빨간 꽃요 뒷산에는 노란 꽃요
빨간 꽃은 치마 짓고 노란 꽃은 저고리 지어
풀 꺾어 머리 허고 그이 딱지 솥을 걸어
흙가루로 밥을 짓고 솔잎을랑 국수 말아
풀각시를 절 시키세
풀각시가 절을 허면 망근을 쓴 신랑이랑
꼭지꼭지 흔들면서 밤주먹에 물마시네...
박완서 / "미망" 중에서
"저물녘의 황홀"
그러던 어느 날 엷은 꽃구름을 두른 한 그루 나무가
땅 속에서 솟은 것처럼 그 한가운데 나타났다.
어머, 저기 벚꽃나무가 있었네.
딸도 그것을 처음 본 듯 이렇게 환성을 질렀다.
엷은 꽃구름은 불과 일주일만에 활짝 피어났다.
어찌나 미친 듯이 피어나던지 야적장을 드나드는 중기차 때문에
딱딱한 불모의 땅이 된 공터에 묻혔던 봄의 정령이
돌파구를 만나 아우성 치며 분출하는 것처럼 보였다...
박완서 / "저물녘의 황홀" 중에서
"저녁의 해후"
시접골 그의 집은 바깥채는 초가고 안채는 기와집인
전형적인 송도 가옥이었다.
안뜰은 희고, 마루는 길이 잘 들어 거울처럼 번들댔다.
화강암이 부서져서 된 그 고장 특유의 토질은
도시 전체를 조용하고 정갈하게 보이게 했지만
그날 그집 안뜰은 유난히 희게 보였다.
마치 송악산에서 몇 날 며칠 마련한 당목을 길길이 펴놓은 것 같았다.
부엌 앞 긴 돌엔 치자나무 화분이 놓였었고
동쪽 담장 밑엔 국화꽃이 만발해 있었다...
박완서 / "저녁의 해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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