八大山人(본명:朱답)은 明末 淸初의 전환기에 중국회화를 근대화시킨 인물이다. 明代에는 심주, 서위등 근대적 문인화가의 출현이 많았으며 팔대산인은 이들의 뒤를 이어 문인수묵화계의 새로운 시대를 전개한 신문인화풍의 개척자이다.
1624년 明의 초대황제인 朱元璋의 후예로 태어나 1705년 8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서화에 뛰어났고 부친 역시 산수화에 능하였으며 백부와 숙부 모두 그림에 능한 명수들이었다. 그의 유년시절 교육은 이러한 가풍의 절대적 영향을 받았으며, 과거에 응시, <諸生>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淸에 의해 그의 나이 19세에 明室이 멸망하고 고향인 南昌이 淸軍에 함락되자 집안의 역대 산소가 있는 洪崖山으로 도피하였다가 26세 무렵에 출가하였으며, 4년 후에는 도교의 법을 전수 받고 宗師가 되었다. 1678년 청의 毒計로 전국의 학자들에게 고시를 실시할 때, 수차례 상경의 종용을 받자 결국은 미친 것을 가장하여 위기를 넘기고 대문에는 <啞>자를 붙여 타인과의 대화를 거절하였으며 어느 때는 웃고, 어느 때는 울며, 춤을 추기도 하였다.
그는 평생을 奇人으로서 또는 狂人으로서, 漢族의 한을 간직한 유민으로서 외로운 삶을 살며 淸朝에 대한 설움을 藝文으로 달래며 詩, 書, 畵의 三絶을 이루었다. 팔대산인 회화의 의의는 무엇보다도 독창적이고 자유분방한 화풍으로 동기창 이후 형식화되고 정형화되어 진정한 사의정신이 결핍된 채 매너리즘에 빠져있던 문인 수묵화계에 새로운 국면을 전개시켰다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근대성 내지 현대성을 시사하는 것으로 양주팔괴, 오창석, 제백석 등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며, 근대 중국 미술 뿐 아니라 한국과 일본화단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八大山人은 일생동안 기묘한 형상의 서명을 많이 남겼다. 그 중에서도 후세에 가장 많이 알려진 <八大山人>이라는 서명은 <哭之>나 <笑之>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는 그 자신의 詩句 중 “웃어도 울어도 영원히 멈출 수 없다(無聊哭笑漫流傳)”라는 내용에서 볼 수 있듯이 그의 일생 및 사상과 긴밀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팔팔조도(叭叭鳥圖) 화첩 종이에 수묵 31.8*27.9cm 일본 개인
연지소금도(蓮池小禽圖)부분 두루마리 종이에 수묵 37.5*330.2cm 신시내티미술관
석창포도(石菖蒲圖) 화첩 종이에 수묵 30.3*30.3cm 프린스턴대학미술관
서과도(西瓜圖) 화첩 종이에 수묵 24.5*31.5cm 대북고궁박물원
방동원산수도(倣董源山水圖) 방황대치착색산수도
팔대산인의 서명입니다.
八大山人이라는 네 글자를 세로로 연결하여
<哭之>또는 <笑之>처럼 보이게 썼습니다.
웃어도 울어도 영원히 멈출 수 없다(無聊哭笑漫流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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