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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와 우산 든 남자' 캔버스에 아크릴물감 2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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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형순 |
| '파란만장 조영남전'이 오는 14일까지 '정동경향갤러리'에서 열린다.
조영남(60), 뿔테 안경에 한 번도 찡그린 표정을 볼 수 없는 정말 노래 잘 하는 사람, 멕시코 민요인 그의 노래 '제비'를
듣고 있으면 그의 목소리는 하늘이 내린 소리 같다. 하지만 그는 이상하게도 자기 노래가 없는 가수라는 괜한 악평에 시달리기도 했다.
느닷없이 그가 여기저기서 전시회를 연다는 소리에 처음엔 당황했다. 하지만 그는 1973년에 이미 서울미대 서양화과에 다니던 김민기
주선으로 '한국화랑'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당시 김민기는 그에게 이런 식으로 응원을 보냈다.
"그림이 괜찮은데, 흠 꽤 재미있어.
저런 글씨는 익살스럽고 말이야. 취미 삼아 한 번 쯤 해보는 것도 괜찮겠지. 껄껄껄."
사실 이 장난기 어린 말 속에 조영남 그림의
핵심이 있다. "재미있다. 괜찮다. 익살맞다" 사실 그의 그림은 천상병 시처럼 웃음이 나온다. 그는 이미 사람을 웃길 수 있었기에 성공한
셈이다. 독창적이거나 별나지 않는데 쉽게 웃음이 나올까. 하긴 박수근도 당시로는 그림 대상이 될 수 없었던 서민들의 풍속화를 그리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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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선' 캔버스에 아크릴물감 2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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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형순 |
| 조영남은 한국인의 화투에 대한 이중성을 고발하는 것을 재미 삼아 그리다가
가장 창의적 오브제를 얻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화투 그림에 대해 천연덕스럽게 너스레를 떨고 있다.
"누가 뭐라고 하던 간에 내
화투 그림은 성공이다. 전유성은 날더러 화투 공장하다가 화투 공장 말아먹으려고 하느냐 그렇게 화투를 그리느냐 물은 적이 있지만 난 정말 화투를
못한다. 그러나 난 화투 속에 아름다운 그림이 있음을 처음 발견했다. 큭, 칵, 헷, 헴."
문제는 기성작가들이 그의 그림 앞에서
당황하고 있는 것 같다. 대한민국에서 조영남처럼 자기가 그리고 싶은 그림은 제멋대로 그린 작가가 몇이나 될까. 고3때 미술반장을 한 경력은
있지만 그는 고군분투하며 혼자 힘으로 그림을 익혔다. 하긴 미술교육을 안 받았기에 이런 독창적이고 기발한 착상을 했는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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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동에서 온 꽃' 캔버스에 아크릴물감 19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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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형순 |
| 조영남은 자신이 그림 그리게 된 원인을 피와 혈통에 돌리고 있다. 그는
남다른 집안 내력을 가지고 있단다. 그의 큰아버지 자녀들은 모두가 음악 전공자이고 그의 두 번째 큰 아버지 자녀들은 모두 미술 전공자란다. 그는
그 중간쯤 된다는 말이다. 자신이 그림을 쉬엄쉬엄하는 것 같지만 실은 음악보다 더 심각하다고 고백한다.
그가 반해서 그림을 하게
한 화가로는 러시아 출신 프랑스 화가 '스타엘'이 있다. 그는 현대미술에서 큰 족적을 남겼다. 스타엘 그림은 동서양 중간점에 있는 것 같다.
러시아 출신이라 그런가 보다. 조영남의 1970년대 초 그린 '해방촌'이나 '자화상'을 보면 정말 그의 그림과 많이 닮았다.
또한
그가 좋아한 화가는 '폴리아코프'가 있다. 그 역시 러시아 출신 프랑스 화가로 칸딘스키 상을 탄 바 있다. 그 밖에도 '로스코'가 있는데 그
역시 러시아 출신 미국 화가이다. 그의 작품 NO.6가 최근 경매에서 180억에 낙찰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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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영광' 캔버스에 아크릴물감 119×59cm 2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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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형순 |
| 그는 20세기 미술 경향에서 한국에 뿌리내리지 못한 것 3가지로
'다다'와 '초현실주의' 그리고 '팝아트'를 꼽고 있다. 자신이 그 빈 공간을 메우고 싶단다. 그 말대로 워홀의 팝아트나 뒤샹의 초현실주의는
동양적 정서에는 잘 안 맞는다. 그러나 그는 화투 그림으로 한국판 팝아트를 창조적으로 계승했다. 그를 보면 팝아트가 조금
보인다.
자유분방, 좌충우돌
조영남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은 하고 마는 성격 같다. 자유분방, 좌충우돌 그
자체 같다. 하긴 돈이 없었다면 그렇게도 못했으리라. 다만 그는 그럴 듯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사는데 충실했다. 그러다 보니 남에게
엄청나게 욕도 많이 먹었다. 지난 번 친일 발언(?)이 그 대표적 사례지만 그의 솔직함에 뒤끝은 없어 보인다.
그에게 큰 점수를
준다면 그것은 바로 발상의 전환이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아무도 미술 오브제로 여기지 않았던 화투나 태극기를 그린 것이다. 이런 그의 착상은
일상생활과 밀접하게 닿아 있고 너무 흔하기에 더 시시하게 하찮게 여겨졌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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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것들' 캔버스에 혼합 재료 20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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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형순 |
| 그는 "고상한 취미를 극대화하는 것이 행복의 지름길"이라고 했다. 그의
행복론은 말로는 쉬워 보이지만 실제로 이루긴 어렵다. 우리에겐 아직도 '취미나 취향의 권리'가 보장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예술가에게 이 권리는
목숨과 같은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나아지긴 했지만 아직 멀었다. 예컨대, 부모들의 자녀 진로이나 배우자 선택에서 보면 그렇다.
그는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는 재미 미술가 소니아 한의 눈에 띄여 우여곡절 끝에 1990년 6월 미국 LA '시몬스갤러리'에서 초대전을 가지게
되었다. 미국에서 정식으로 화가로 데뷔한 셈이다. 그렇게 되기까지 잠깐 그의 생애를 살펴보자.
그는 1968년에 국내에서 가수로
데뷔 1973년 제대했고, 노래를 잘해 느닷없이 빌리 그래햄 복음단 가스펠 가수가 되어 1년 반 동안 전 세계를 누볐다. 그리곤 마침내 미국
플로리다에 정착하여 거기서 신학을 전공하고 미국 목사 자격까지 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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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지론의 애국심' 캔버스에 혼합 재료 72×72cm 20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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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형순 |
| 그리고 1981년 귀국하게 되면서 자신의 예수관을 정리하여 <어느
한국 청년이 본 예수>라는 책을 냈는데 그 책 삽화에 사흑싸리 다섯 끝자리 화투 그림을 넣어 한국 교인들에게 외면을 당한다. 하긴 이런
엉뚱함이 오늘의 그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는 1976년부터 유학 생활을 하면서 향수를 달래는 수단으로 틈틈이
화투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화투는 전혀 못해도 거기서 특유의 투박한 색채와 인생 궤도를 축약한 무속과 역학을 발견한 것이다. 1978년 화투
쪼가리에 편견이 없는 뉴욕에서 작은 전시회가 열렸고 작품이 팔리기도 했단다.
기상천외, 신출귀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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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깃발' 캔버스에 혼합 재료 2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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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형순 |
| 그 이후 1992년 백남준을 만나면서 그는 모든 미술에 대한 편견과
부담감에서 완전히 벗어나 해방감을 느꼈고 정말 화가로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한국적 기질의 기상천외하고 신출귀몰한 장난기를 발동한다는 면에서
백남준과 조영남은 서로 닮았다.
그는 20세기 회화의 중요한 요소인 해체와 입체를 도입하고 '스타엘'처럼 추상과 구상을 적절히
배합하고 팝아트 요소와 오브제의 다양한 실험을 한다. 그러더니 어느 날 갑자기 화투에 진력이 났는지 80년대 말부터는 바둑판, 초가집, 노끈,
바구니, 태극기, 공화기까지 등장한다. 작가는 그때의 심경을 이렇게 고백한다.
"내 미술에서 화투뿐만 아니라 바둑, 바구니를
점진적으로 소재화했다. 화투를 그리다가 같은 놀이 도구인 바둑판도 눈에 들어왔고, 바구니를 뒤집어 놓으니까 바둑알이 보였다. 바구니를 뒤집어
반으로 접으니까 그냥 초가집이 되었다. 미술에서 초가집은 나의 어머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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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 국기' 캔버스에 아크릴물감 19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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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형순 |
| 정말 그의 초가집 그림을 보면 우리 모두가 돌아갈 어머니 품 같다. 또한
그의 차별화 전략 중 하나인 태극기 그림은 2002년 월드컵을 계기로 각광을 받게 시작한다. 그의 예언은 적중했고 사람들 생각은 바뀌었다. 길고
어둔 터널을 빠져나와 다시 밝은 빛을 되찾은 사람처럼 그는 이렇게 환호했다.
"태극기 조형은 사실 고약하다. 무궁화도 애국가 그림도
시원치 않아 싹 바꾸었다. 고약하지만 태극기 조형으로 근사하게 그림을 만들면 실력을 인정받을 것 같다. 그래서 헉헉거리며 그림을 그렸다. 그런데
2002년 월드컵이 날 살렸다."
미국에서 한국까지 종횡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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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구니가 있는 풍경' 캔버스에 혼합 재료 19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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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형순 |
| 그는 1990년 LA 시몬스갤러리 초대전을 계기로 미국에서 한국까지
종횡무진 전시회를 열었다. 1995년에는 용인 한국미술관에서, 1998년에는 인사동 상갤러리에서, 2000년에는 미국 샌디에고에서,
2001년에는 다시 인사동 상갤러리에서, 2003년에는 과천 제비울미술관에서 그리고 올해 경향갤러리에서 '파란만장 조영남전'을 열고
있다.
이번 전시회에는 또 한 번 놀랐다. 바로 스티로폼을 이용한 인물 부조 작품 때문이다. 소설을 쓰다가 뜬금없이 시를 들고 나온
격인데 아직 뜸이 덜 들고 덜 익었지만 그 발상법은 또한 신선하다. 그의 조형성을 새롭게 실험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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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예술가들' 20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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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형순 |
| 거기엔 작가가 좋아하는 예술가들이 다 모였다. 그에게 최고 예술가는 시인
이상인가 보다. 그에겐 왕관을 씌웠다. 한국적 예기로 세계 미술을 뒤엎은 백남준이 앞에 있고 그 뒤로 박수근, 이중섭, 오방색으로 한국 미술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린 박생광, 한국 조소의 선구자 권진규 그리고 유명한 피카소와 야스퍼 존스와 필립 가스통도 끼여 있다.
그리고
그의 인생 60년을 정리하듯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사진 콜라주와 부딪치게 된다. 거기에는 그와 만났던 많은 사람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김대중 등 전현직 대통령은 물론 클린턴 등 세계 지도자부터 김세환 등 동료 연예인까지 총망라되어 있다. 만남의 폭이 얼마나 넓고 그가
얼마나 열심히 살아왔는지 한 눈에 읽을 수 있다.
그 자신은 가수보다는 화가로 남고 싶은 것이 그의 간절한 희망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자기 노래가 없다고 구박을 듣던 그가 화가로서 제자리를 찾았구나 하는 안도감에 한숨 돌리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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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2-12 10: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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